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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 있으라’.


이번 전시는 인물과 풍경 시리즈를 함께 선보이는 자리입니다. 이 두 요소를 아우를 수 있는 맥락이 과연 무엇인지 생각해봤습니다. 그것은 바로 ‘빛’이었습니다. 빛은 만물을 존재하게 하는 기본 요소입니다. 데모크리토스는 우주의 기본단위는 원자이고 제각각 다른 이유는 원자간 배열의 차이라고 말했습니다. 대단한 통찰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0과 1’로 환원 시킬 수 있는 세상이 도래했으니까요. 제가 자개로 표현한 인물과 풍경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디지털 미디어를 통해, 그리고 풍경에 나타나는 모든 장면들은 이른바, ‘제3의 눈’인 카메라 앵글을 통해 촬영되고 여러 가지 디지털 스킬을 통해 윤색 되어진 무한대의 사본 위에 비로소 자개가 얹혀 짐으로써, 일련의 작품으로 구현됩니다. 지금껏 자개로 작업하며 꾸준히 미디어에 대해 생각해왔습니다. 어떤 면에선 다분히 전통적인 물성인 자개로 디지털을 구현 한다는 것이, 참 형용 모순 한 행위일 수도 있단 생각했습니다만, 바로 그 지점이 시각적 생경함을 불러올 수 있는 요소라고 생각했습니다. 세상은 미디어에 의해 돌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요. 미디어는 일종의 ‘메시지’ 입니다. 하지만 메시지의 진위여부는 그것이 도래하는 시점에서는 파악하기 힘듭니다. 마치 우리가 보고 있는 수천, 수 억년 전의 별을 이제야 밤하늘에 서 볼 수 있는 것처럼요. 생각해 보면 우리가 현시점에서 ‘안다’ 라고 생각 되어 지는 모든 인식들은 마치 허상 위에 놓여 빈 공간을 떠돌아 다니는 전파 같은 것과 다른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예전에 귀신이나 유령이라고 여겨졌던 것들이 이제는 전파나 픽셀이라는 헛것의 옷을 입고 실제(real)보다 더 실재(true)적인 것처럼 주위를 유영합니다. 이쯤 되면 모든 것이 모호하고 모든 의미 결정은 유보될 만 합니다. 자개가 가지고 있는 반투명한 성질, 그리고 빛의 반사 각에 따라 다르게 빛나는 특성들이 고정되었지만 결코 고정되어 있다고 말할 수 없는 형용 모순한 상황을 만드는 좋은 수단이었습니다. 그리고 비트 단위로 표현 되는 형태는, 멀리 선 명확하나 다가가면 마치 추상적 색 점 들로 흩어집니다. 이렇게 모호하고 애매한, 헤아릴 수 없는 끝없는 자개 파편들은 마치 밤하늘 별을 보고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기에 충분합니다. 지금까지 밝혀진 우리 은하에 존재하는 별의 개수는 1000억개, 이렇게 구성된 은하의 수도 1000억개에 이른다 하니 이쯤 되면 어느 것이 시작이고 어느 것이 끝인지 조차도 파악하는 일조차 무의미하게 느껴질 지경입니다. 결국 기술이 발달하고 문명이 진보하면서 많은 것을 ‘안다’ 라고 생각하지만 정작 근원적 물음에 대한 해답은 더욱 묘연할 뿐입니다. 어쩌면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 만이 끝없이 모호한 세상에 한 가닥 빛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역설적이게도 성서의 첫 구절이 더 세련되게 다가옵니다.

‘빛이 있으라’ -김일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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